프롤로그
영화 아름다운 비행에서 알에서 깨어난 새끼오리들이 주인공 에이미를 어미로 알고 따르는 장면이 나오는 데 이것을 동물학에서는 각인(imprinting) 효과라고 한다.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새끼오리들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대상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현상을 말하며 이 이론은 1973년 노벨 의학. 생리학상 수상자인 콘래드 로렌츠(Konrad Lorenz)에 의해 확립되었는데, 나는 오늘날의 한국 대중들의 사고가 봉건 사회를 벗어나 의식의 자각기를 이루는 과정에서 특정한 세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각인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글은 그런 사람들의 사고 작용에 대한 이야기 이다.
주변으로부터 ‘사람 좋다’는 말을 자주 듣는 K씨는 법 없이도 살 만큼 착한 사람이다. 그를 안지 십 수 년이 됐지만 그가 인상을 찌푸리고 화를 내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는 노상 주차장에서 주차비를 징수하는 장애인이다. 언제 어떤 사고를 당해 장애를 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늘 미소를 띠고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서인지, 안면의 주름살 자체가 미소 짓는 모습의 탈이 되어 가는 것 같다. 명절 연휴 끝자락에 다른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와 마주쳤는데, 가벼운 안부 인사나 나누던 평소와 달리 꽤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해 피해가려 했지만 그가 먼저 말을 건 내 왔다. 그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꽤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나니 낭패감과 피로감이 함께 몰려왔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아침부터 자정 무렵까지 매연을 맡아가며 고되게 일해야 겨우 생계를 꾸려가는 그는 사회적 약자 임이 분명할진데, 왜 용산참사의 책임이 철거민 세입자들에게 있다고 믿고 있으며, 아비규환의 참사를 연출한 경찰의 무모한 진압작전을 왜 두둔하는 것이며,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킨 개발독재를 두둔하는 것인지 마음이 아팠다.
나는 그를 도저히 설득할 수 없었다. 아니 그가 주장을 펼칠 때 별다른 반박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의 주장이 반박할 수 없을 만큼 논리정연해서는 아니었다. 왜 사회적 약자에 속하며 착하고 순박하기만 한 그가 부도덕한 기득권층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고 기득권층을 오히려 옹호하는지 알고 싶었다. 이것은 단지 K 개인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서민이나 빈민에 속하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갈취하는 기득권층에 순종하고 그들의 입장을 오히려 옹호하는 사람들이 널려있지 않은가?
이 글은 K와의 대화 뿐 아니라 비슷한 논지를 펼치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들을 포함해서 느낀 바를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지면상 글이 너무 장황하고 산만해질 우려가 있어 구체적인 대화 내용은 적지 않았다.
개발독재 옹호론-박정희 통치시대의 그늘
20세기 후반의 대한민국은 국조 단군의 개국 이래 국운을 최고로 떨친 시기였으며 박정희의 통치기간은 그 토대를 다진 시기였다는 것인데, 이런 주장은 꽤 그럴듯한 근거를 통해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한국이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됐을 당시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들은 우리에게 식량을 원조해줄 만큼 잘살았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동남아 국가들의 생활수준은 70년대의 한국 사회와 유사하다는 것이며, 우리 사회가 이런 발전을 이룬 것이 박정희의 공로라고 한다.
그들은 “우리가 반만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하지만, 우리나라가 언제 세계 10위권의 무역 대국의 반열에 오른 적이 있었는가?”라며 “나라 안에 있을 때는 우리 사는 게 참 힘들다고 생각되지만 동남아 국가나 몽골 등을 보면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자랑스럽다.”고도 한다. 물론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이 누리는 경제적 지위가 박정희의 공로 때문만은 아닐 것 이지만, 그들 스스로가 그렇다고 믿는 데야 굳이 아니라고 할 도리가 없다. 박정희 통치기간 18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년의 3분의 1에 이를 만큼 긴 시간이었고, “당신이 보리 고개를 겪어 보지 않아서..”라는 말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니 말이다.
그들은 박정희나 전두환의 독재가 따지기 좋아하고 분열하기 좋아하는 국민들을 통치하기 위한 필요악이며, 양극화를 심화시킨 투기 세력의 득세는 단지 고도성장 과정의 부작용일 뿐 이라며 애써 의미를 축소한다. “동남아 국가 독재자들은 부정했지만, 18년이나 권좌에 있었지만 사후에 달랑 집 한 채만 남긴 박정희 대통령은 얼마냐 청렴했는가?“는 주장을 듣는 순간 술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그들은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교역국가라는 것이 곧 세계 10권으로 잘 사는 나라라고 착각하는 듯 했다. 한국의 노동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 일하지만 내 집 한 칸 마련하기가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나라 중의 하나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살인적인 교육비 부담은 또 어떤가?
세계 어떤 나라에서 전 국민의 85%가 대학에 진학하며, 거의 모든 가정이 자녀를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서 생활비의 절반 가까이 혹은 그 이상을 사교육비로 지출하는 나라가 어디 있으며, 대학 진학 후에도 취업을 위해 학원을 전전해야하는 나라가 몇 이나 있는가?
박정희가 청렴했다고?
그가 사망한 이후 그의 자녀들이 생업에 종사한 일이 전혀 없었다. 집 한 채 달랑 남았다던 그의 자녀들은 정수장학회 이사장 자리를 두고 형제상잔했으며 최근에도 육영재단의 주도권을 놓고 형제상잔 중이다. 자산 시가가 수조원에 달한다는 정수장학회나 육영재단의 지분을 상속받는 것이 천문학적 재산을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합법적으로 상속받는 방법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까?
박정희가 남긴 재산은 달랑 집 한 채가 아니었으니 그가 청렴했던 것은 결코 아니며, 우리 국민이 OECD 국가 중 가장 질이 낮을 뿐 아니라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만큼 고단한 삶을 살고 있으니 그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도 없다. 우리나라는 개인 소득이 2만 달러에 달하는 국가 중 가장 생활비가 많이 들고 가장 양극화가 심하며 여가를 가장 즐기지 못하는 전형적인 후진국형 사회라는 것을 이해시키기엔 그들의 의식이 너무도 완고하다.
PS:
이 글은 후속 글을 통해 [재벌이 경제 발전을 이끈다는 믿음, 법치질서 확립에 대한 대중의 인식, 에필로그] 등의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출처 : http://blog.hani.co.kr/phosarang/17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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